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른스트 룀 (문단 편집) == [[장검의 밤]] == 히틀러는 룀을 처단하기를 매우 주저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 내에서 룀을 반대해 오던 [[헤르만 괴링]], [[하인리히 힘러]], [[파울 요제프 괴벨스]] 등은 룀의 처단을 벼르고 있었다. 괴링은 [[게슈타포]]를 힘러 휘하로 전속시켜 SA의 반역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캐내게 하였다. 힘러의 SS와 그 휘하의 보안국(SD) 국장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룀이 프랑스에게 뇌물 2000만 마르크를 받고 6월 24일 히틀러 정권을 SA로 전복하려 했다는 거짓 증거를 만들었다. 히틀러는 괴링, 힘러, 하이드리히 등이 그동안 만들어온 '''살생부'''를 바탕으로 SS에 총동원 명령을 내렸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동안 룀과 동료들은 바트비제로 휴가를 떠나 있었다. 6월 28일 히틀러는 룀에게 전화를 걸어 회의를 위해 6월 30일까지 모든 SA지휘관을 바트비제에 소집할 것을 요구했고, 룀은 별다른 의심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운명의 30일이 밝자, 히틀러는 직접 바트비제에 도착하여 힘러 휘하의 SS를 동원, 룀과 SA 지휘관들을 일망타진하였다. 히틀러는 자고있던 에른스트 룀에게 "룀 너를 체포한다"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이제까지의 벗이었던 룀에 대해 너(Du)란 2인칭 용어를 사용했다.] 룀은 경악하여 반역을 부정했지만 히틀러는 이미 방을 빠져나간 뒤였다. 체포된 후 다른 돌격대 간부들과 함께 뮌헨의 슈타델하임 형무소에 보내진 룀은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돌격대 간부 6명의 총살형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룀은 이 날 처형되지 않았는데 히틀러는 "룀의 그 동안의 공적을 생각해서 형을 면하게 해주었다"라고 술회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베를린으로 돌아간 뒤 그의 구명의지를 [[힘러]]와 [[괴링]]이 반대했기 때문에 7월 1일 정오 경 형집행으로 룀은 끝내 살아남지 못한다. 히틀러는 후에 다하우 강제수용소장이자 악명높던 제3SS기갑사단 토텐코프의 창설자가 되는 [[테오도어 아이케]]에게 룀에게 자결기회를 주고 만약 자결하지 않으면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오후 3시경, 아이케는 부하인 [[미하엘 리페르트]]와 함께 슈타델하임 형무소에 있는 룀의 독방을 방문했다. 아이케는 룀에게 "당신은 사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총통은 그대에게 최후결단을 위한 기회를 주었다."라고 말하며 룀의 체포 및 그가 반역자였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는 나치당 기관지와 자결용으로 한 발의 탄환이 들어있는 권총을 두고 독방에서 나갔다. 기관지를 읽고 상황을 파악한 다음에 알아서 자결하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룀은 신문을 다 읽고도 자결하지 않았으며 10분을 기다려도 총성이 울리지 않았기에 아이케 일행은 다시 룀의 독방으로 들어갔다. 룀은 권총을 내버려두고 가만히 있었다. 이에 아이케는 권총을 회수한 다음에 룀에게 웃통을 내놓으라고 지시했다. 룀은 할말이 있다고 외쳤으나 아이케는 듣지 않고 리페르트에게 룀을 쏘라고 명령을 내렸고 리페르트는 룀을 향해 총 2발을 쏘았다. 총에 맞은 룀은 마루에 쓰러지면서 총통 각하...(mein Führer...)라고 외치면서 절규했다고 한다. ~~히틀러: 이제 말했냐?~~ 그러자 아이케는 "당신은 그걸 더 빨리 말했어야 했다."라고 이야기했고[* 당시 룀은 히틀러에게 '너'(Du)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 일부러 그러고 있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슬슬 괴벨스와 괴링을 위시한 측근들이 히틀러를 '총통 각하'라고 부르기 시작하던 때였으나 룀은 히틀러를 총통이라고 부르는 일이 드물었다.], 룀이 아직도 숨이 붙어있었기에 다시 한 발을 더 가슴에 쏘아 그를 살해했다.[* 앞서 쏜 두 발과 달리 이 최후의 부분에서는 쏜 게 아이케였는지 리페르트였는지가 확실하지 않다. 이언 커쇼의 히틀러 평전에서는 둘이 같이 쏘았다고 보았다.] SA 숙청의 표면적인 이유는 반란음모 혐의였지만, 이는 처형 며칠 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6월 30일에 일어난 이 일련의 사건으로 나치당 내의 좌익 계열은 일소되었으며, 나치당 좌파의 영수인 [[그레고어 슈트라서]]도 이때 암살되었다. 이를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 사건이라 한다. 장검의 밤 때 죽은 사람들 중에는 [[나의 투쟁]]의 편집자도 있었고 심지어 대통령 힌덴부르크의 측근이었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도 있었는데 즉 당내 좌파뿐만이 아니라 당내 우파 중 수뇌부에게 밉보인 자들 및 평소 정권에 거슬렸던 인물들도 동시에 숙청된 것이다. 초법적인 숙청과 집단처형이었지만, 이미 돌격대의 평판이 너무나 나빴기 때문에[* 외교관과 일반 시민들까지 함부로 두들겨패는 돌격대의 깽판 때문에 나치당원들조차 저런 짓은 '''유대인이나 공산주의자'''(...)에게 해야지 왜 엉뚱한 사람들에게??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일반 시민들은 오히려 히틀러가 나라의 기강을 되찾아주었다고 환호하며 히틀러의 조치를 대단히 환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